본문 바로가기
책 리뷰/인문 사회 과학

#34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깨알 정리(P.551~560) 너 자신을 알라

by Bon ami Bon ami 2020. 6. 23.

사피엔스    유발 노아 하라리 조현욱 옮김이태수 감수 출판사 김영사





 

청록색은 제 이야기이구요

검정색은 책에 실린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4부 과학혁명

 

<삶의 의미>      P.551

 

헉슬리가 그려낸 당황스러운 세계는 행복과 쾌감이

동일하다는 생물학적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행복하다는 것은

쾌락적인 신체적 감각을 느낀다는 것과 같다.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은

이 감각의 크기와 지속기간을 제한한다.

따라서 높은 수준의 행복을 일정 기간 이상

느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의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행복에 대한 이런 정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육아의 경우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

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이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아무리 고난스러워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

 

자기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는것으로 보는 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할까요?

 

니체는

 

의미 있는 삶은 아무리 고난스러워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

 

 

반면 하라리는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입장입니다.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행복은 자기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거죠.

 

술꾼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술꾼A는 반 병 남은 술을 보고

 

아이쿠, 술이 벌써 반이나 사라졌네!”

 

라면서 절망하는데

 

술꾼B는 반 병 남은 술을 보고

 

아아, 아직도 반이나 남았어!”

 

라면서 기뻐합니다.

 

 

ㅎㅎㅎ

 

행복이란 결국 주관적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의미가 있고 없고는 관계가 없죠.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행복하면 그뿐 아닌가요?

 

자기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자기기만,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하다 봅니다.

그러니까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은

매우 현명한 행위라 생각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P.554

 

만일 행복이 쾌락적 감각을 느끼는데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만일 행복이 삶의 의미를 느끼는 데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더 효과적으로 기만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선택지는 없는 것일까?

앞의 두 견해는 행복이란 모종의 주관적 느낌

(쾌감이든 의미든)’이라는 가정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논리적인 가정으로 보인다.

우리 세대의 지배적 종교가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주관적 기분을 신성시한다.

개인의 기분과 느낌이 권위의 최고 원천이라고 본다.

 

그러나 역사상 대부분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선함, 아름다움, 당위에는

객관적 척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의 느낌이나 선호는 신뢰하지 않았다.

델포이의 아포론 신전 입구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

 

라는 글귀는

보통 사람은 진정한 자신에 대해 모르며

따라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함축한다.

프로이트와 기독교 신학자도

아마 여기에 동의했을 것이다.

 

주관적 느낌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은

기독교만 가진 것이 아니다.

찰스 다윈, 리처드 도킨스, 성 바오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자연 선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전자 복제에 좋은 행동을 선택하게 만든다.

설사 그 선택이 개체에게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들의 DNA는 자신의 이기적 목적에 따라

악마와 마찬가지로 덧없는 기쁨을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그 결과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르게 접근했다.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방식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의 측면에서 일치한다.

 

즉 행복은 외부 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 그런 추구를

멈추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이 모든 것이

개인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기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행복에 대한 입장은 각자 다 다릅니다.

 

자유주의자는 주관적 입장이고

종교이데올로기는 객관적 입장입니다.

불교는 통찰면에서는 주관적 입장(=생물학)이나

결론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동안 우리 사피엔스들은 개인의 행복과 고통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개인은 역사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나 봅니다.

최근 들어서야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건 시대가 달라졌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역사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 행복’,

 

지금부터 열심히 파 봐야겠군요.

댓글0